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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사 님 설 교 말 씀 :::


  mogyang(2020-01-17 23:09:29, Hit : 100, Vote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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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따라야 할 선진들의 신앙

  히브리서 11장을 일컬어 믿음 장(章)이라고 하는데, 믿음의 본질을 일깨워 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언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믿음을 일종의 기대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계시는지 아니 계신지 알지 못하지만 막연하게 계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그런 식으로 근거 없이 막연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일까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믿음은 성경 말씀에서 출발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믿음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진실한 성도들은 성경을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근거에 관해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성경의 영감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 한 자, 한 자를 영감하셨다는 축자영감설을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들을 단순한 필기기계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개성과 경험과 기질 등을 활용하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유기적 영감설을 지지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를 믿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한 구절이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실험을 통해서 입증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이것은 과학의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조금도 의심 없이 알고 섬깁니다. 우리는 크게 세 가지 눈을 갖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육신의 눈입니다. 우리는 이 눈을 가지고 사물을 분별합니다. 책상인지, 걸상인지, 색깔이 파란색인지 노란색인지, 크기가 큰지 작은지 등등을 분별합니다. 또 하나의 눈은 이성의 눈입니다. 과학은 이성을 대표하는 눈입니다. 원자나 전자와 같은 미립자는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입증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하나님을 알려면 마음의 눈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 18절을 보면 ‘마음눈을 밝혀 달라’는 간구가 나옵니다. 육신의 눈이 아무리 밝아도, 과학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눈이 어두우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마음의 눈이 밝아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의 눈은 믿음의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것이 어려움 없이 믿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현실에 이루어진 것처럼 의심 없이 믿습니다. 마치 직접 내 손으로 붙잡은 것처럼 너무나 분명합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바라는 것들은 아직 나에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바라는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과 같습니다.

1절에 ‘바라는 것들’이란 우리가 주관적으로 바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본 적이 없지만 실재한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 곧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은 그들의 삶을 통해서 믿음의 진실성을 입증해 보여주었습니다. 만일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같은 분들이 믿음으로 살았으나 실패한 인생으로 끝났다면, 그것은 그들이 믿은 것이 진실한 것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기우에 불과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진들은 믿음으로써 위대한 인생을 살았고,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운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 없고, 손에 잡히는 것 없고, 귀에 들리는 것 없을지라도 성경 말씀대로 믿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감각이나 이성의 판단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믿음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십시오. 육신의 눈은 착시 현상을 일으켜 잘못 보기 쉽습니다. 이성도 완전하지 못하므로 판단에 있어 많은 오류를 범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선진들의 행적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저마다 시대도 다르고 당면한 문제도 달랐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위대한 삶을 살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바라보았으며, 마치 바라는 것들이 이미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처럼 확신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부끄럽게 아니하시고 후대의 우리들을 위해 믿음의 모범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시험을 물리치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믿음의 본질을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들어서 아는 것 같은데, 머리로만 알기 때문에 힘이 없습니다. 진실로 아는 사람은 행함을 통해서 자기의 믿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머리로만 아는 믿음은 가능성에 불과하며, 그 믿은 바를 행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믿는 바를 순종할 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들 모두, 선진들의 믿음을 본받아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모험’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있다면 어쩔거냐, 그러니 예수님을 믿어 천국에 가면 좋고, 혹 천국이 없어도 손해 볼 것이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럴 때 믿음은 ‘한번 해볼 만한 모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설명은 비성경적이고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론을 말하면, 기독교 신앙은 모험이 아닙니다. 모험은 그 일의 결과를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도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결과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이미 받은 상태에서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한번 믿어보자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있음을 확실하게 알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계시다고 믿고 보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심을 확실히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보증수표와 같습니다. 은행의 보증수표는 혹 부도가 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보증수표인 믿음은 절대로 부도가 날 리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믿음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기초가 부실하여 결국은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성도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힘써야 합니다. 성경은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속에 믿음이 생겨납니다. 세상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들어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이제 아벨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아담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 가인이고 둘째가 아벨이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부였는데 땅의 소산으로 제물 삼아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는데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4장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신 이유에 대하여 “4)…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한 표현이 중요합니다. 제물을 바친 자와 그가 바친 제물을 별도로 여기지 않고 함께 평가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제물이 거절당한 것은 가인의 신앙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인의 제물에 하자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가인의 제물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피가 없다는 것인데 일리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볼 때, 제사는 짐승을 잡아 번제로 바친 것이었습니다. 이때 제물의 피를 반드시 제단 아래 부어야 했습니다. 곡물을 바치는 소제가 있었으나 이는 짐승 제사의 보조적인 성격을 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인이 곡물로 제사를 드린 것은 일종의 편의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께서 명하신 법도에 따라서 섬겨야 하는데 인간의 편의에 따라서 섬기는 것은 가인의 제물과 같이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바친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 둘 다를 열납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말씀하기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아벨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 된 것은 그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으나 그는 지금도 살아서 믿음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에녹의 믿음은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일까요? 창세기 5장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른 조상들의 생애에 대해서는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는 말로 끝맺는데, 에녹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다’고 증언합니다. 성경에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두 사람이 나오는데, 에녹과 엘리야가 그들입니다.

에녹이 이 같은 특별한 은총을 입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세상의 풍속을 좇지 않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먼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으므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여행을 떠난다면 어떤 사람과 동행하고 싶으십니까? 고집이 세서 자기주장만 하는 사람이나,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과 함께 하면 여행 기간 내내 힘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통하고, 만나면 반갑고, 오래 함께 있어도 기분이 좋고,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과 동행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에녹이 그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기 원하시거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슨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없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많은 제물을 바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으므로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6절에서 사도는 우리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믿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기본적인 것이지만,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신앙생활에 열심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형식적인 신앙, 죽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과 영원하심과 무소부재하심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사랑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상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운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데 대하여 상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상을 받기 위함입니다. 만일 상이 없다면 그렇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섬기되 상을 바라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상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벨과 에녹에 이어서 살펴볼 믿음의 선진은 노아입니다. 노아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6장에서 8장에 걸쳐서 나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사악했던지 그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홍수로 멸하실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의인으로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뜻을 알려주시고 거대한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에는 지구 환경이 오늘날과 같지 않아 홍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를 멸할만한 대홍수가 임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길이가 135미터, 폭이 22.5미터, 높이가 13.5미터나 되는 거대한 방주를 무려 12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서 건조했던 것입니다. 나무를 베어서 운반하고, 재목으로 켜고, 이어서 배를 만드는 일을 순전히 사람의 손으로만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노아의 수고가 얼마나 막심했을까요?

또한 당시 사람들은 홍수 심판에 대비해서 방주를 짓는 노아를 보고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그러나 노아는 흔들림 없이 묵묵히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홍수 심판이 임했을 때 온 인류와 코로 호흡하는 생물이 다 죽었으나 노아와 그의 가족 도합 여덟 명은 방주에 들어감으로써 무사히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노아가 방주를 건조한 것은 믿음이 없이는 감히 실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12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이로 인해 노아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홍수 심판에서 그와 그의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아가 아벨과 에녹의 뒤를 잇는 믿음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를 비웃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살지 못하고 다 멸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으므로 정죄를 받아 멸망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노아의 때와 같이 죄악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처음부터 악하며, 사람들은 다 육체가 되어 쾌락을 위해 살아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세에 임할 심판을 이 같이 경고합니다.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

세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 말해 주면 무슨 공상 소설을 말하는 것이냐며 비웃습니다.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믿는 성도들을 순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지어낸 말이 아니요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변치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노아처럼 믿음으로 장차 임할 심판을 대비해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 안에 들어감으로써 홍수 심판에서 구원 받았듯이, 말세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성도들이 받은 모든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것”입니다. 방주 바깥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 멸망당했듯이,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물질문명에 도취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술과 쾌락과 돈에 취해서 주님의 강림이 점점 가까워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권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경고를 무시했던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다 멸망했듯이,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들도 파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가 어떠한 때인지를 올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세상일에 마음 빼앗겨서 살아가지 말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믿음을 준비하고 신랑이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말세가 가까울수록 신앙의 세계에서도 양극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믿음이 좋은 신자들은 더욱 더 믿음으로 살려고 힘쓰고,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아가는 신자들은 더한층 정신을 못 차리고 세상을 좇아 살아갈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을 홀려서 세상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성경적인 기준이나 원칙을 버리고 욕망을 따라 살아가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믿고 언제나 모이기에 힘쓰고 주의 일에 열심 내는 성도들이 되어서 주님의 강림을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믿음의 선진 가운데 한 사람인 아브라함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라는 이름도 영광스럽지만,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라는 칭호는 더욱 영광스럽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할까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데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은 이 같이 증언합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 세 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다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순종하여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모든 재산과 종들을 이끌고 정든 고향산천을 떠났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 구절은 짧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절대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에 맞지 않을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자기 생각에 맞게끔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말씀이면 순종하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경제생활도 하나님의 말씀을 원리 삼아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성도들이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경제활동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주일 성수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 되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면 경제가 어려워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내세 신앙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기업의 땅인 가나안에 살면서도 돌이나 나무로 견고한 집을 짓고 거한 것이 아니라,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염소 가죽으로 만든 장막은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임시 거처에 불과합니다.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내세가 있음을 믿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지상의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세계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함을 알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독교는 현세적인 기복 신앙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원래 내세 신앙입니다. 현세적인 축복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영적 축복에 대한 덤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지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형통한 삶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건강을 구하는 것도 그래야 주의 일을 힘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벨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은 모든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믿음의 선조들입니다. 그 분들은 저마다 다른 시대에,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았으나 동일한 믿음으로 의로운 자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성도들 역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점에서, 믿음의 선진들과 같은 편에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믿음의 수준을 아벨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같은 단계까지 향상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함으로 우리 믿음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처럼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성도님들의 심령 속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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