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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사 님 설 교 말 씀 :::


  mogyang(2020-04-20 22:27:03, Hit : 178, Vote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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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까?

제목 없음

어제 오전 10시 기준으로, 전 세계의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수가 225만 명에, 사망자 수가 15만 4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안심할 단계는 아니나 그래도 조금씩 진정 국면을 보이고 있지만, 미국을 비롯하여 일본과 유럽의 국가들은 오히려 사태가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의술과 사회 시스템이 발전한 선진국들이 하나 같이 고전하는 것을 보면서 깨닫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서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하여 인류가 자만하고 높아진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의 두려움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각성하고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고 바로 세우는 기회로 선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세계 경제에도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각 나라마다 대량 실업이 생기고 국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국민들에게 생활지원금을 나누어 주는 국가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국가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는 경우는 대한민국의 건국 이래 처음 겪는 일입니다. 그래도 국민들에게 생활비를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가 발전했다는 점에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시편 127편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시편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직 그들의 역량을 의지하고 살아가며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해온 과학기술문명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과 과학기술만 있으면 무엇이든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번과 같은 역병에 대해서는 그 같이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류는 불신앙을 버리고 겸손히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아마도 이번 사태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번 역병 사태를 전도의 기회로 선용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심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친지와 이웃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여야 합니다. 큰 도움을 줄 수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마스크 한 장으로도 얼마든지 관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역시 이웃을 동정하고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전도 역시 불신 이웃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 것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가련한 인생들에게 관심을 가지신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들이 죄와 마귀에게 종살이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범죄한 인생들은 사랑하셨기에 구원을 베풀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에 이르기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범죄한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죄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지만, 독생자로 하여금 죄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도 실현되었고. 죄인들의 구원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는 근거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신 것은 그 분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영벌을 받아야 할 인생들의 죄를 대신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의로움에 대하여 성경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대신 지불하셨으므로 이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의롭다는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를 정죄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사탄도 성도들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와 그의 가족이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처럼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결코 정죄를 받지 않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궁극적인 구원인 영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받은바 구원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 신앙생활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은, 그들이 구원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하여 알긴 하지만 자세히 알지 못하고 건성으로 알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말을 들어도 감동이 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 있으면 그냥 넘길 것이 아니라 담임 목사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을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확인하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열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아는 만큼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고,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심을 내게 됩니다. 신앙의 열심은 우리가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심은 작심삼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어야 신앙생활에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찬송가를 작사한 존 뉴턴은 회심하기 전에 노예선 선장으로서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을 붙잡아 쇠사슬에 묶어 신대륙에 데려다가 팔아먹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사악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회심하고 새 사람이 되어 이처럼 은혜로운 간증을 한 것입니다. 신앙을 지식으로만 아는 것은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나 자신이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알고 통탄이 여기며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 부르짖는 단계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가를 깨달아 전율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 단계들을 거쳐야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쓰기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3-14a)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 최고의 교법사였던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율법학자요 헬라 철학에도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특권층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대접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알고 나자 그때까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로마 총독 앞에서 사도 바울을 고소하기를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행 24:5)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를 변호할 차례가 되었을 때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고 총독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시간을 다 썼습니다. 이에 총독 베스도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나 주님을 사랑하였고 복음 전하기를 열망하였기에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미쳤다는 말을 듣기를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정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한 성도들은 불신 이웃으로부터 미쳤다는 말을 들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주일 성수하는 것을 보고서 그 시간에 일하면 얼마를 벌 텐데 미쳤다고 말합니다.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다니 미쳤어 라고 합니다.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예수에게 미쳐서 교회만 다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사람들에게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동생들조차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을 보고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미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미지근한 상태로 만족하지 말고 주님을 본받아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쳤다고 비난하지만, 알고 보면 그들이야말로 무언가에 단단히 미쳐 있습니다. 정치가들은 권력에 미쳐서 살고, 사업가들은 사업에 미쳐서 삽니다. 많은 사람이 성공 출세를 위해 미쳐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미친 사람들도 많고, 술과 쾌락에 미친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상에서도 목표를 이루려면 미쳤다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물며 죄악 세상에서 진실한 믿음을 지켜나가려는 성도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토록 열정적으로 복음 사역에 헌신한 이유에 대하여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사도는 하나님과 성도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헌신했습니다. 세인들의 비난은 그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미쳤다고 하든,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든, 그는 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보살폈습니다. 옥에도 가고, 매도 맞고, 사람들의 비방을 받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강권함을 받았으므로 주님을 위하고, 성도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어머니가 강한 이유는 자녀들에 대한 사랑에 강권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정글북’이라는 동화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키플링은 세계일주 여행 중에 어느 항구에서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 대장이 승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두에는 한 무리의 구세군들이 나와서 탬버린을 치면서 부스 대장을 전송하고 있었습니다. 성미가 까다로웠던 키플링은 이 광경이 매스껍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여행 중에 부스 대장과 친해졌을 때 전에 그가 못마땅하게 여겼던 일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스 대장이 말하기를 “젊은이, 만일 내가 물구나무를 서서 내 발로 탬버린을 쳐서 한 영혼이라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재주를 배우겠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부스 대장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을 위해 마음 쓰고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강권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만큼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의 열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무엇보다 사랑의 강권하는 힘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것은 주님의 사랑에 의해 강권함을 받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나타났을까요?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특별하고 위대한 것은 그것이 인생들을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모든 인류를 대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는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묻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행 2:).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생명을 희생하기까지 하신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생명을 희생하신 주님을 위해 살아야지 자신을 위해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풍성히 누리는 길이 됩니다. 주님을 위해 살 때 우리는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 살 때 우리는 주님의 평안을 누리게 되며,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강권함을 받는 성도는 사람들을 대하는 차원이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이해관계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대했지만, 이제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대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한갓 가난한 목수요 이단의 괴수로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죄수 정도로 알았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보니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고 믿을 때 우리는 말할 수 없이 위대한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데, 사도는 말씀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전보다 생활이 건전해 졌다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함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어둠에 속한 자였었는데 이제는 빛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마귀에게 속해서 종살이하던 자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세상 욕심을 따라서 살았는데 이제는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갑니다. 가치관이 달라졌고 인생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과 같아도 우리의 속은 전혀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는 디도서 3장 10절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새롭게 됨은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거듭남 곧 중생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 자신의 실상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신분에 합당한 생활을 할 신성한 의무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임하셔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일러주시는데,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순종하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었고, 영적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서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살았던 아무 소망도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로는 이전과 다른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마지막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타락한 인류의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죄에 물든 생활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미움 대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할 각오를 한다면 얼마든지 마음을 새롭게 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면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좇아서 살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속을 좇아 살아갈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만 열려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좇아 사는 것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약하면 작은 시험에도 넘어지고 세상 유혹을 이겨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순종하면 얼마든지 세상과 정욕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는 순전히 우리 각자의 영적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정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성도가 세상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신분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 믿는다고 하면서 세인들의 비난을 받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이 불분명한 것이 그 원인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이 새로운 피조물답게 살려면 힘쓰고 애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은 시간만 가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수양을 하고 도를 닦아도 죄를 이기고 정결한 삶을 살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죄를 이기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힘쓸 때 성령께서 능력을 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답게 변화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아들답게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할까요? 우리를 구원하시려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자취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인들은 첫 사람 아담의 자손으로 타락한 삶을 살아가지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성도답게 주님을 위해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나누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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