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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사 님 설 교 말 씀 :::


  mogyang(2020-05-12 16:01:09, Hit : 98, Vote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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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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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실 때였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나아와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이 사람과 비슷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구원을 받을까?”

“나는 교회생활을 오래했으니 구원받을 것이 틀림없어”

“나는 모태신앙이니까 당연히 구원 받을 거야”

그러나 구원은 유대인이라고 무조건 받는 것이 아니고, 또한 우리가 원한다고해서, 또는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라고 믿는다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누가 그에게 선택 받은 자들이라고 말해 주었습니까?

그뿐 아니라, 구원 얻을 자가 얼마나 되는지에 관해서도 우리가 관심을 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원 얻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에 관심 갖지 말고 “너 자신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서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나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며, 좁은 문은 좁은 길과 연결되어 있으나 넓은 문은 넓은 길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좁은 문보다 넓은 문을 좋아하고 좁은 길보다 넓은 길을 좋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넓고 곧고 포장이 잘 된 고속도로를 좋아하지, 좁고 울퉁불퉁하고 굽은 비포장도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아도 고생 없이 편하게 살려 하지, 땀 흘려 수고하는 삶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과 관련해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불편을 감수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힘쓰라”는 말은 시합에 나간 선수나 전쟁터에 나간 군인처럼 분투하라, 죽을힘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로 받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유대인들의 주장처럼 본디부터 구원을 보장 받은 민족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위치는 유리한 조건이지만 그것 자체가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죄를 사하는 것이지 우리 공로는 조금도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로지 예수님을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좁은 길을 가는 것은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비유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고 따르려면 많은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고 싶지만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믿기로 마음 먹고 교회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좁은 길을 가는 것이 힘들고 재미없어 다시금 넓은 길로 가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킵니다.

한국동란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4일을 기점으로 후퇴하는 유엔군과 국군을 따라서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들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 때는 일 년 중 가장 추운 시기였습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기차나 자동차를 쉽게 이용할 수 있던 때가 아니어서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걸어서 남하했습니다. 피난 열차마다 짐칸과 지붕 위에도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영하 20도, 3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차가운 철판으로 된 짐칸이나 열차 지붕에서 추위와 찬바람을 견뎌야했습니다. 왜 그런 힘든 길을 선택했을까요? 그것만이 사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산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북한에 남았을 것이나 더러는 피난길의 어려움을 감수하기 싫어 남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 후에 공산당의 통치 아래서 많은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피난길을 택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와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고난의 피난길을 택한 것과 같지만 결국은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꺼이 좁은 문을 들어가서 좁고 불편한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기독교인이라고 다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넓은 문,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인도 아래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나온 이스라엘 자손은 장정이 60만 명이나 되었으나 그들 가운데 다수가 불신앙으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새 세대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지만 실은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도 있고, 목회자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이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눈은 속여도 주님의 불꽃같으신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기회는 사람이 원하면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눅 13:25)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원하면 언제라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을 줄로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열려 있었던 구원의 문이 닫힐 때가 있는데, 곧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를 말합니다. 그 때 구원에서 제외된 자들이 주님께 와서 호소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이 사람들은 주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아니라,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과의 관계를 상기시키면서 선처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르시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방심하여 게으르지 말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연조나 직분을 내세우지 말고, 과거에 충성했던 것을 자랑하지 말고, 지금 열심내고 충성함으로 주님의 인정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고생을 피하고 편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다보니 요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가급적이면 편하게 믿고 싶어 합니다. 할 일 다 하고, 놀 것 다 놀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예배하러 교회에 나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가급적이면 긴장을 피하고 비난을 받지 않으려다보니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소신껏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이 같은 상태에 있다면 그 안일한 신앙자세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하기를 “값싼 은혜가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원수다. 우리는 값비싼 은혜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은혜 받으려는 것은 값싼 은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는 경제위주의 시대에 걸맞게,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경제 원리를 적용하려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하나님을 섬겼으니까 하나님께서도 내가 한 만큼 복을 주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세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기복과 무속적 기복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복이란 복을 빈다는 뜻이므로 기복 신앙이란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복이란 단어가 빈번하게 나오며, 우리 하나님을 복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 상급으로 주시는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먼저이고 복 받는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첫 번째 목적은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 받는데 관심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문이시므로 그를 믿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좁은 문, 구원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 노릇을 하는 것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위선을 버리고 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것은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체포되었어도 로마 황제 가이사를 퀴리오스 곧 주(主)로 인정하고, 황제의 신상 앞에 향을 사르면 무죄 방면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 가이사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주님으로 인정했으며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기독교인이 기꺼이 순교를 택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콜로세움이라는 원형 경기장이 남아 있는데, 그곳은 기독교인들이 맹수들에게 잡혀 먹히거나 화형을 당하여 순교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구(舊) 로마 근교에 카타콤이라는 지하에 조성된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층계로 내려가면 지하에 바둑판처럼 사방으로 뻗은 통로가 나오고, 그 통로를 따라가면서 좌우 벽에 시체를 넣은 공간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간혹 수십 명이 모일만큼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이 초대교회 당시 박해 받던 기독교인들의 예배장소였다고 합니다.

약 250년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이 순교의 각오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주후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고, 그 얼마 후에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틴은 교회를 후원하고 성직자들에게 특권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황제의 눈에 들기 원하는 고관들이 교회로 몰려왔고, 백성들도 교회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회개의 관문을 거치지 않은 교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콘스탄틴에 의해 핍박이 사라졌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타락이 시작되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회개를 거쳐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은 값싼 축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런 신자는 아무리 많아도 주님을 따르는 진실한 성도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확고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세속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의로운 행실을 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곧 성도다운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전에는 자기를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우리는 지옥 백성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셔서 천국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는 목적이 이전과는 달라졌습니다.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 하신 대로, 성도들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 찬송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어렵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쉬운 방법으로 주님을 섬길 수 없을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핍박을 받지 않고 칭찬 받고 대접 받으면서 주님의 인정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로 믿으려면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생애의 마지막 시점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붙들고 만류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만 자아가 살아나는 바람에 실패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자아가 생생하게 살아있으면 주님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곧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날마다 자아를 부인하기 위해 치열하게 영적 싸움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좁은 길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렵고 힘들더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좁은 문, 좁은 길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대속의 십자가는 오직 예수님께서만 지셨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우리 각 사람이 주님을 섬기기 위해 감수해야 할 어려움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면 인내와 용기가 있어야 하고,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충돌을 피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하셨습니다. 부모 자식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보다 그들을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믿지 않는 가족들이 항의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남편인 나, 둘 중에 누가 더 소중하냐?”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부모와 배우자와 자식을 사랑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어려움을 두려워 말고 기쁨으로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너나 할 것 없이 그리로 들어갑니다. 반면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험해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합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다가는 괜한 고생을 할 것 같아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좁은 문을 버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머지않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면, 넓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과 좁은 문을 선택한 사람들 중에 과연 누가 현명한 선택을 하였는지 판명 날 것입니다. 또한 어느 길이 멸망의 길이고 어느 길이 생명의 길인지도 확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넓은 문과 좁은 문, 넓은 길과 좁은 길, 둘 가운데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하신 주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좁은 길을 걸어가는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광스런 천국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영생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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