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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사 님 설 교 말 씀 :::


  mogyang(2020-05-31 18:56:47, Hit : 83,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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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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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을 들라면 누구나 의(衣)․ 식(食)․ 주(住)라고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의식주의 중요함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 되었으므로 의와 식은 이미 해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주거 문제는 지난한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북한 주민들은 매년 곡물생산이 부족해서 먹는 문제가 가장 시급합니다. 북한 노동자의 월급이 3천〜4천원 수준인데 그 돈으로 쌀 1kg이나 옥수수 3〜4kg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월급으로 사는 북한 주민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머지 부족분은 나름대로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거나 부업을 해서 충당합니다. 그러니 북한 주민들의 생활이 얼마나 곤궁한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빈민국인 케냐나 탄자니아, 우간다 그 외에 여러 나라에서는 수도나 우물이 없는 마을이 많아서 그곳 주민들은 물을 구하느라 무진 고생을 합니다. 수 킬로나 떨어진 웅덩이까지 가서 거기 고인 불결한 물을 길어다 먹습니다. 그들에게는 깨끗한 물이 제일 시급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티비에서 서울로 유학 간 대학생들과 지방에서 상경한 직장 초년생들의 어려운 주거 실태를 취재한 것을 보았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 평가량의 고시원이나 옥상에 들인 쪽방이나 반지하방에서 생활하면서 어렵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부담 없이 몸을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가장 필요할 것입니다.

2020년 지방직 9급 교육 공무원 채용시험의 전국평균 경쟁률이 15.4대 1입니다. 그리고 광주는 전국에서 가장 비율이 높아 무려 35.4 대 1이나 되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취업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이나 성공보다 건강 회복이 가장 절실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처해 있는 형편이 다르므로 저마다 필요로 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은 돈입니다. 그 이유는, 돈만 있으면 의식주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양식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필요한 물건을 마음껏 살 수 있고, 집 없는 대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생길 리가 없을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병이 들어도 최고 수준의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으므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돈의 위력이 이처럼 대단하므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문제를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있을까요? 주체할 수 없으리만치 많이 가진 부자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부자들은 다 행복할까요? 어느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부자가 될수록, 사회의 상류계층으로 올라갈수록 행복도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려간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부자가 될수록 심한 경쟁에 직면하기 때문에 심한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부자들의 전유물인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어느 계층이나 다 경험할 수밖에 없는 국민병(國民病)이 되었습니다. 가진 자는 가진 자대로, 못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대로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경쟁이 심해져 가기만 하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가 더 가중되어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 스트레스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스트레스는 천식, 습진, 두드러기 같은 알레르기 현상과 편두통, 고혈압 또는 저혈압 발작과 같은 심혈관계 질환과, 소화불량, 요통, 변비 등을 일으키며, 불안과 우울증,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적인 증세를 유발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불면증과 같은 수면장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산속에 들어가서 은둔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산속에서 산다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 산속생활은 그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답은 무엇일까요? 마음에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건강하면 다가오는 모든 스트레스를 너끈히 견뎌낼 수 있지만, 마음이 취약하면 가중되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파탄을 내고 맙니다. 행복한 삶은 의식주의 해결이나 몸의 건강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건강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건강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 근심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지켜주실 때, 일상 속에서 수많은 스트레스가 밀어닥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건강하면 우리의 생각이나 말과 행위가 건전하게 되어 불행의 단초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이 같은 은혜를 받아 누렸음을 말해 줍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하였으나 그 후에 바벨론을 멸망시킨 메대 왕 다리오의 수석 총리가 되어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두 명의 총리와 신하들이 유대인인 다니엘이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시기하여 다니엘을 함정에 빠뜨릴 계략을 꾸몄습니다.

하루는 그들이 왕에게 나아가서 이렇게 고했습니다.

“다리오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라의 모든 총리와 수령과 방백과 모사와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려 하였는데,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그런즉 왕이여, 원컨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어인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왕은 신하들의 뜻을 좋게 여겨 조서에 어인을 찍어 공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들의 계략이 자기를 겨냥한 것인 줄을 알면서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을 열고서 평소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로 인해 다니엘은 고소를 당했고,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구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여러분,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은 조서에 명시된 30일 동안만 기도를 쉬거나, 또는 창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하거나, 밤중에 기도하는 방법으로 대적들의 올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사야 26장 3절에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하신 것이 그 답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평강에 평강을 부어 주셨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평강에 평강’을 ‘퍼펙트 피스’(perfect peace) 곧 ‘완전한 평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평강을 다니엘의 마음에 부어주셨으므로 사자 굴이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다니엘은 아무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초창기에 유대와 사마리아를 통치하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지도자 몇 사람을 체포하였고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는 사도들의 대표격인 베드로를 체포해서 옥에 가두고는 경비병 16명을 네 패로 나누어 지키게 했습니다. 때는 무교절 기간이었는데, 절기가 끝나면 야고보를 죽였듯이 베드로를 처형할 작정이었습니다.

드디어 헤롯이 베드로를 처형하려던 전날 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옥에 갇혀 두 쇠사슬에 묶여, 두 병사 틈에서 잠들었고, 옥문 앞에는 파수꾼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 밤중인데 홀연히 주의 천사가 나타나자 옥중이 환해졌습니다. 천사가 잠든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우며 "빨리 일어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풀렸습니다. 천사가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므로 그대로 하였더니 "겉옷을 두르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옥에서 나와 천사를 따라가면서도 그 일어난 일이 참인 줄 모르고 자기가 환상을 보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들이 첫째 초소와 둘째 초소를 지나서 시내로 통하는 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바깥으로 나와서, 거리를 하나 지나자 천사가 떠나갔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출 받아 가이사랴로 피신했습니다.

성도님들, 옥에 갇힌 베드로를 상상해 보십시오. 감방 안에서조차 두 손목을 쇠사슬로 묶어 두 군사와 연결시킨 상태로 지냈습니다. 이렇게 엄격하게 지킨 것을 보면, 이번에 베드로를 기어코 처형시키려는 헤롯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상황입니까? 그런데도 베드로는 겁을 먹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할 만큼 깊은 잠을 잤습니다. 이는 사도 베드로의 마음에 평강이 충만했음을 보여 줍니다. 시편 127편 2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하신 대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잠을 주신다는 것은 평강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우면 잠을 잘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정신적, 심적, 육체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나름대로 방법을 찾지만, 하나 같이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고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에 유흥업소가 얼마나 많은지 밤만 되면 도시가 온통 유흥단지로 바뀌는 실정입니다. 우리 사회 어디든 노래방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왜 노래방이 그렇게 많이 생겨난 것일까요? 노래와 춤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려는 사람이 많아서 일 것입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면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는 있을 것이나, 술로 인해 건강을 해치고, 유흥에 탐닉하여 정신이 타락하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평안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재물, 지위, 명예, 건강, 등등 외적인 조건에 기인하는 평안입니다. 경제 사정이 좋을 때에는 쪼들리지 않으니까 평안합니다. 그러나 경제가 나빠지면 마음이 불편해 지기 시작합니다. 지위가 있을 때에는 어딜 가나 대접을 받으니 평안하지만, 지위를 상실하면 대접도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 평안도 사라집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수갈채를 받을 때는 기분도 좋고 평안하지만, 명예를 잃어버리면 마음이 씁쓸해지고 평안이 사라집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건강할 때에는 평안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지면 매사에 자신감이 사라지고 마음도 우울해집니다. 평안이 사라진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것은 누구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좋은 조건이 형성되면 평안이 따라오고, 그 조건이 깨어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바로 이런 것이 세상이 주는 평안의 성격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건부적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기인한 평안이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일시적이 아니라 항구적인 평안입니다. 외적인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평안이 아니라 내적인 조건에 따라서 오는 평안입니다. 내적인 조건이란,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말합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조건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평안을 맛볼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이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짐으로써 누리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7장 21절에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의인이 아니라 악인입니다. 사람들의 보기에 선량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죄인이요 악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평안은 대속의 은총에 기반을 둔 평안입니다. 대속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이 평강을 누릴 수 없으며, 죄가 있는 곳에는 이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려면 죄의 해결이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형벌을 당하심으로 그들의 죄 값을 치러주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가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목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이르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누리는 평안은 영원불변한데,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히 속량 받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세상이 주는 평안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에 기반을 둔 것이므로 일종의 신기루와 같습니다. 사막의 신기루는 온도와 밀도가 서로 다른 공기층이 아래위로 겹쳤을 때 일어나는 현상인데, 이때 빛이 불규칙적으로 굴절되어 지평선 너머에 있는 상(像)을 반영합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대상들이 물을 찾아 저 멀리 보이는 오아시스를 향하여 다가가면 오아시스는 사라지고 뜨거운 모래벌판만 있습니다. 그러나 신기루인지 아닌지를 미리 파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하신 대로, 세상이 주는 평안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결국 멸망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안은 외적인 조건이 어떻게 변하든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자가 없습니다. 성도들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만나 생활이 힘들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의 권면을 생각하면서 힘을 얻습니다.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얼마나 마음 든든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삶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평안을 소유한 성도들은 지위나 명예를 잃어도 그 때문에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8)…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주님의 평안은 우리 몸이 병약할 때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질적인 병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가시처럼 아주 성가시게 만드는 병이었습니다. 그가 병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세 번 기도했더니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위대한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9)…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

종교개혁가인 칼빈도 매우 병약했습니다. 기관지천식, 신경통, 위장병 등, 그야말로 움직이는 종합병원과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칼빈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므로 은혜를 입어 교회를 위한 위대한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칼빈은 병약함을 통해서 오히려 주님만 의지하였고 그 결과 귀하게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평안을 받으면 모든 난관을 너끈히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주님의 선물인 평안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평안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고난을 당하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을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불화가 청산되었고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평안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평안을 실제로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셨으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의 삶은 우리 각 자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므로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께서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맡길 때 평안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우리는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믿음으로 맡기지 않는 한 주님의 평안은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어느 선박이 태풍을 만나 여러 날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다가 한 곳에 이르렀습니다. 바람이 고요해져서 한 숨을 돌렸으나 마실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배 한척을 발견하고 “물을 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물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지금 두레박으로 저 물을 길어 마시면 되지 않소” 라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배는 풍랑에 밀려 아마존 강 한 복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사방이 마실 물인데,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갈증으로 고생했던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이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풍파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심령과 삶 속에 주의 평안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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