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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사 님 설 교 말 씀 :::


  mogyang(2020-07-06 16:47:57, Hit : 81, Vote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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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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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데 경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것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를 시행하는 사회에서는 돈의 위력이 대단합니다. 사회의 모든 이슈 가운데 첫째가 경제입니다. 아무리 정치적인 성과를 많이 거둘지라도 경제를 망치면 그 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국민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해서 소득을 많게 해야 좋은 정부로 인정받습니다.

범죄 중에서도 경제와 관련된 것이 가장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줍니다. 예를 들면, 투자사기는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수백, 수천 명에게 피해를 입힙니다. 큰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교묘하게 사기를 치기 때문에 신중하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정치가들 가운데는 뇌물을 수수했다가 감옥에 가는 사례가 종종 일어납니다. 공정이 생명인 재판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상식처럼 통합니다.

돈이 있으면 일반인이 우주선을 타고 우주관광을 하는 시대입니다. 2001년 4월에, 미국의 억만장자인 데니스 티토는 2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40억 원을 내고 인류 역사상 첫 우주관광을 다녀왔습니다. 지금까지 일곱 사람이 우주관광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면, 돈이 만능은 아닙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죽음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미인과 결혼할 수 있으나 실은 돈으로 산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평화는 돈을 주고 살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재물이 많으면 교만해 지기 쉬워 하나님을 찾지만 가난하면 겸손해 져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유리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물론, 심령이 가난한 것과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부자는 교만하여 심령이 가난하기 어려우나 가난하면 마음이 겸손해 진다는 점에서 둘은 통합니다. 어느 시대나 부자는 주님을 믿기 어렵고, 서민들 가운데서 믿는 사람이 가장 많습니다.

무엇보다 돈을 주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지 못합니다. 죄 사함도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돈을 낼지라도 거듭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신령한 은혜와 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벧전 1:18)라고 했습니다. 돈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만 유용하지 영구적이지 못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이르기를 “…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번영하던 소돔 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유황불에 소멸되었듯이, 주님께서 하늘 구름을 타시고 강림하시는 그 날 성도들은 공중으로 들림 받아 주님을 영접하지만, 재물을 의지하고 살던 사람들은 세상물건 불탈 때에 함께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구원은 은과 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황금을 주고도 구원을 살 수 없습니다. 그만큼 구원이 귀합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달러를 다 지불할지라도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무슨 값을 지불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의 죄 값을 지불하고 속량 받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하여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불하신 대가가 무엇일까요?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9)고 했습니다.

“오직” 이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구세주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한없이 귀한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보혈을 흘려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영적 신분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형편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 할 것이 없으니 구원자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것도 대단한 일인데, 이제 성도들은 천국 시민이 되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재산이나 학식이나 지혜나 재능 따위를 보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전자는 믿음이 있으나 후자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곧 은혜로 구원 얻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은 것이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믿음은 우리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만들어낸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벧후 1:1)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므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에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만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 아닙니다. 건강, 시간, 재능, 지식, 재물, 친밀한 인간관계 등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우리의 결심으로 하려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인간적인 열심은 금방 식고 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변함없는 열심을 갖고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우리로 알게 해 주옵소서’라고 구해야 하겠습니다(엡 1:).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을 실천하라고 권했습니다. 먼저, 사랑하려면 마음이 정결해야 합니다. 사특한 마음을 가지고는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거룩한 자녀들입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이나, 인종이나 국적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에서 매주 만나는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바로 그 사랑을 본받아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이 같이 말씀합니다.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은 타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독생자를 희생하는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성도들이 나타내야 할 사랑은 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씀하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희생하셨듯이, 우리가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때로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성격을 말해 줍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투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가집니다. 무례히 행치 말고, 자기 유익을 구치 않으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생각을 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려면 우리의 감성 뿐 아니라 의지와 지성도 동참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전 인격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을지라도, 아가페 사랑은 그리스도인이라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참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질을 부여받았으므로 적극적으로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열심히 사랑해야 하는 이유로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단체와 공동체가 있지만, 다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탈퇴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거듭난 성도들로 이루어진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혈육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만 관계가 존속되지만, 거듭난 성도들은 영원한 형제입니다. 이러므로 믿음의 형제들을 귀히 알고 대우해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 사랑을 실천하려면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려 하지 말고, 그 형제의 형편과 처지를 고려해서 역지사지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해한다’를 영어로 understand라고 하는데, “…의 아래에“라는 뜻을 가진 under와 ”서다“라는 뜻을 가진 stand가 합쳐져서 만들어졌습니다. 곧 남을 이해하려면 상대방보다 낮은 자리에 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낮은 자리에 서지 못해도 적어도 눈높이를 같이 할 만큼 몸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할 수 있고, 비로소 진정한 대화가 되고 올바른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일까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인생들을 구해 내시려고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어 우리 인생들과 같이 되셨고, 우리를 이해하시고 돕기 위해 인생들의 삶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가난도 맛보시고, 멸시와 천대도 당하셨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도 당하셨고, 채찍질도 당하셨고, 죽음까지도 당하셨습니다. 우리보다도 더 인생의 쓴 맛을 두루 체험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2장 18절에 이르기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을 상하게 하기 일쑤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그런 신자들에게 말씀하기를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 2:)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지 아니하는 씨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에 비유하셨습니다. 죄인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사람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살아있고 영원하신 말씀으로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거듭남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영구한 것이 없으며 다 낡고 소멸해 가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24)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육체란 모든 인간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을 풀에 비유하고, 인간들이 자랑하는 모든 영광을 풀의 꽃에 비유했습니다. 풀은 한 때 왕성하게 자라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철이 바뀜에 따라서 성장을 멈추고 누렇게 말라 버리며, 꽃은 풀보다 더 짧은 기간만 아름다움을 드러내다가 금방 떨어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한 평생은 풀과 같아서 청년기와 장년기를 거치면서 왕성하게 활동하나 곧 이어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쇠약해져 가다가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젊음은 꽃과 같이 아름답지만 쉬 지나가고 맙니다. 요즘은 젊음을 좀 더 오래 유지하려고 화장품도 쓰고, 피부 마사지도 하고, 성형 수술도 하고, 보톡스도 맞고, 별의별 방법을 다 합니다. 그리하여 언뜻 보기에는 젊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동감이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월에 맞서서 승산 없는 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계절의 변화에 따라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지듯이 늙어가는 과정을 순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힘도 약해져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만약에 육체가 늙어감과 동시에 우리의 내면도 늙어간다면 얼마나 비참할까요?

요즘 저는 새삼 고상하게 늙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옛날에는 노인이 마을이나 집안에서 존경을 받았고 언행에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노인이 받아야 할 대우를 젊은 계층이 독차지 한 느낌입니다. 젊어야 대우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은 세상 풍조를 보고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늙어갈지라도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져 가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믿음이 더 성숙해지고, 인생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고, 시간적인 여유를 기도와 묵상에 사용하여 고상한 지혜를 갖게 되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도 탁월해지고 언행에 여유가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이 젊어서 노후 대책을 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노후 대책은 내면적으로 성숙해지고 믿음이 온전해져 가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가장 최선의 노후대책은 부활의 소망을 갖고 주님의 강림을 대망하면서 형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소망을 붙들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은 신용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의심 없이 믿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맡길 수 있습니다.

사도는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까닭은 복음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고 마치 이 세계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장담과는 모순되게 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제도들이 모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질서와 평화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혼돈과 전쟁을 일삼습니다. 공평과 사랑을 말하지만 불평등과 미움이 이 세계를 지배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생산되는 식량은 인류가 먹고도 남을 정도지만, 소수의 부국이 독점하다보니 굶주리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식량 이외의 자원들도 소수가 독점하고 있으므로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들을 의탁하지 말고 영원하시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맡겨야 합니다. 인간들은 맹세코 한 말도 지키지 않고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리저리 바꾸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절대로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그대로 성취됩니다.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신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세토록 있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시편 102편에 “26)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이 땅을 딛고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불타버릴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법이나 제도에 매여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썩지 아니할 씨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 다른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거짓이 판을 치지만 우리는 진리에 속한 자들로서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해야 하며, 세상은 거짓된 사랑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거짓이 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자기 백성 삼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보호해 주실 것을 믿고 언제나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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