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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사 님 설 교 말 씀 :::


  mogyang(2020-08-04 13:29:01, Hit : 65, Vote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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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을 은혜 받는 기회로 삼으려면

제목 없음

 누구나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시험을 만납니다. 이 세상에서 시험이 없는 곳은 공동묘지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니며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한 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하는 시험입니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가하시는 시험이고, 후자는 마귀가 주는 시험 또는 우리의 욕심으로 인해 받는 시험입니다.

창세기 22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그를 죄에 빠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선민의 조상답게 온전한 신앙인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통과하였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악한 의도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마귀가 인류의 어머니 하와를 시험하였을 때, 마치 아담과 하와를 위하는 것처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귀의 저의(底意)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교만에 사로잡힌 나머지 마귀의 꾐에 넘어가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 먹고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바친 제사로 인해 시험에 들었습니다. 아벨과 가인, 두 사람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그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것을 아벨 탓으로 여기고 솟구치는 악심을 억제치 못하고 쳐 죽였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신 대로, 우리가 범하는 대부분의 죄가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욕심이 발동할 때 초기에 그것을 제압해야지 그렇지 않고 욕심을 키우면 그것이 죄를 낳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욕심이 하나의 생각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없이 욕망을 자극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현대는 광고의 시대여서 대기업들은 일 년에 광고비로 수백억, 수천억을 사용합니다. 광고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상품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로 하여금 그 상품을 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만들려는 것입니다. 소비자의 마음에 그 상품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요즘 사람들은 드라마, 영화, 인터넷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습니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가 정상적이지 않은 인간관계를 테마로 삼기 때문에 그런 작품을 자주 접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릇된 욕망에 끌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쉴 새 없이 욕심을 자극 받는 좋지 않은 환경 가운데 살아갑니다. 더구나 현대인들은 부하고자 하는 욕심에 미혹 받습니다. 그러나 재리의 욕심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방해를 받아 결실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경제활동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욕심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복을 받아 부자가 되는 데 목적을 둔 신자들이 있는데, 이는 성경적으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대하시는 원칙은 경제가 아닙니다. 지위나 학벌이나 의로운 행실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하신 것은 단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이지만, 아직 완전한 수준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단계에서 점점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쉼 없이 자라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시험이 다가오든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마귀의 시험도 믿음으로 물리치면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세 번에 걸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으나 온전히 물리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 패했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승리하셨습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에 받는 시험도 믿음으로 이겨야지 지면 안 됩니다. 가인이 악심을 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고 하셨습니다. 그 때 가인이 회개했더라면 살인을 범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 선생은 시험에 관해 또 하나의 중요한 충고를 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언급한 시험은 우리를 죄에 빠뜨리기 위한 시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류의 시험을 우리에게 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욕심 때문에 시험에 들었으면서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음을 굳게 만들어주실 목적으로 연단을 가하시지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할 목적으로 시험하시는 일은 절대로 없으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을 빙자해서 책임을 면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전혀 시험에 들지 않을 수는 없지만 시험에 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면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흔히 아무개 때문에 시험에 들었다고 말하지만 실은 시험에 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는 시험 받을 때 먼저 나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못하니까 시험이 다가오는구나”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은 진실하지 못하나 하나님께서는 절대 진실하시며, 사람은 악하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뜻과 행사가 다 선하십니다. 우리를 징벌하실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변함이 없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슨 시험이건 지면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불순종의 죄를 짓고 선민의 조상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시험을 통과했으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감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독자를 바치라’고 명하지 않으십니다. 그처럼 어려운 시험은 아브라함과 같이 너끈히 감당할 만한 신앙인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다가올 때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면 안 됩니다. 야고보 선생은 시험이 다가오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시험이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때문에 ‘믿음의 시련’이라고 한 것입니다. 시련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도키미온’인데, 이는 불순물이 들어있지 않은 순은으로 만든 화폐를 의미합니다. 은을 불로 연단해서 순수한 은을 만들듯이, 우리 믿음 역시 불같은 시련을 통해서 온전해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시련을 많이 겪은 성도는 인내를 잘합니다. 그러나 시련을 겪지 않은 성도는 작은 시험에도 힘들어 합니다. 비유컨대, 권투 경기와 같습니다. 보통 사람은 강한 펀치를 한 대 맞으면 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리지만, 오랫동안 단련한 선수는 맷집이 좋아 웬만한 타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챔피언이 되려면 인내를 잘해야지 인내를 못하면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시험이 다가오거든 겁먹지 마시고,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시련을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 선생은 시험을 이기는 방법을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우리는 시험을 믿음과 인내로써 이겨내야 할 뿐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얻은 체험을 유익하게 사용하기 위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식과 지혜는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지식은 배우거나 경험을 통해 얻는 이해나 인식을 말하지만, 지혜는 세상 이치를 잘 알아서 바르게 처리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지식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했다고 반드시 지혜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은 많은데 지혜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식은 부족해도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한 가지, 지금 우리가 언급하는 지혜는 세상 지혜가 아닌 신령한 지혜를 가리킵니다. 세상일은 지혜롭게 처리하는 사람이라도 신령한 지혜가 없으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영원한 내세를 대비할 줄 모르고 세상일에만 집착하여 욕심을 내는 것은 신령한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홀트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신령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인생의 올바른 행위에 필요한 마음과 지성의 능력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 된 성도들에게 신령한 지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무조건 주시지 않고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구하는 자들에게 주십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르기를 “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만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지혜를 구하되 하나님께 큰 기대를 갖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색하신 분이 아니라 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서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때 명심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므로 그의 자녀들이 지혜를 구할 때 거절하지 않으시고 후히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므로 약속하신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현대인 성경은 히브리서 6장 18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이 하신 약속과 맹세는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있는 희망을 붙들려고 피난처를 향해 가는 우리는 큰 용기를 얻습니다.”

아무리 신실한 사람이라도 약속을 백 퍼센트 지킬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사정이 생기면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시므로 식언치 않으시며 능력이 한이 없으시므로 그 무슨 변고도 하나님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육신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하여 자식이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지 못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전능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얼마든지 채워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과 능력을 올바로 알아서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의심하면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도는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하는 것과 같아서 올바른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바람에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변함이 없어야지, ‘응답 받으면 좋고, 응답이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였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뒤에서 따라오면서 큰 소리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하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조금 후에, 그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하고 애원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고쳐주지는 못할망정, 그 여자더러 개라고 모욕을 주다니,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나온 여자에게 너무나 가혹한 처사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실망하고 화를 내면서 물러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달랐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주님의 냉정한 태도에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매달린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동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주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한량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그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고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실 것을 믿었기에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자의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시고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으며, 그 즉시 그녀의 딸이 나았습니다. 만일 이 여자가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싸늘한 태도에 시험이 들어 물러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믿음의 사람이었으므로 어떤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도 응답과 관련해서 우리가 꼭 기억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과 전능하심은 영원히 불변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기 때문에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와 더불어 믿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야고보 선생은 성도들에게 시험을 참을 뿐 아니라 “9)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시험을 참으라는 권면과 연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당시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귀족과 평민과 노예가 있었고, 신분에 따라 경제력도 결정되었으므로 신분이 높으면 부하고 신분이 낮으면 가난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 안에서는 상전이나 종의 구별 없이 다 형제로 대우했지만, 사람인지라 신분이 낮은 성도는 열등감을 느끼고, 신분이 높은 성도는 우월감을 느끼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열등감이나 우월감은 둘 다 사람을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은 사회적인 신분이나 경제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신앙적인 방법을 일러주었는데, 그것은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비천한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해 줍니다. 세상에서는 노예로서 천대 받고 가난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천국을 상속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로마 시민은 대단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체포나 구금을 당하지 않았으며 황제에게 상소할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시민보다 더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사회적 신분이 낮고 가난하다고 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요가 다 우리의 것이므로 항상 부요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합니다. 곧 물질적인 부요나 신분의 높음이 주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그런 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부요와 영적인 부요는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부요는 영적 부요를 방해하기 쉽습니다.

더구나 세상의 부요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마치 풀의 꽃과 같습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아름다움이 없어지듯이, 부한 자들이 화려한 생활을 뽐낼지라도 결국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까닭이 무엇일까요? 교만하기 쉽고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한 형제가 이 같은 사실을 안다면 자기의 부함을 자랑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행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야고보 선생은 시험의 유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여기 쓰인 “시험”은 1장 2절에 나오는 시험과 같은 것입니다. 이 시험은 우리를 죄에 빠뜨리기 위한 유혹이 아니라, 우리를 연단하기 위한 시험 곧 믿음의 시련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시험을 이기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여기서도,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핍박, 고통, 시련이 다가올 때 그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더 확실하게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시련이 다가와도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서 끝까지 참는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주님으로부터 옳다 인정하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군인이 전쟁에서 지면 할 말이 없습니다. 선수가 시합에서 져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지고 나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는 것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는 믿음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에 지면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다는 주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인내로써 끝까지 시험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시험을 이긴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영생을 의미합니다. 계시록 2장에서, 예수님께서 고난 중에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고 하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 세상을 하직하는 그 순간까지 믿음을 지켜나갑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시련으로 인해 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믿음의 성장을 이루고, 강하고 순수한 신앙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하신 대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중에서 주님의 큰 위로와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다가올 때 두려워 말고 믿음의 인내를 발휘하여 담대하게 이겨냄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옳다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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