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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사 님 설 교 말 씀 :::


  mogyang(2021-03-20 21:40:28, Hit : 72, Vote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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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eSKB1z53D8E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무제 문서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골이라는 곳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있었던 일들을 증언한 것입니다. 때는 유대인의 삼대절기 가운데 하나인 유월절을 준비하는 예비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금요일로서 예수님께서는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려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유월절은 그 날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십자가형을 선고받기까지의 일을 대략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요일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셨으며, 새벽까지 대제사장 가야바와 산헤드린 의원들의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운 계획대로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뒤집어씌워서 만장일치로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사형집행권이 없었으므로, 금요일 새벽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로 예수님을 끌고 가서 재판을 청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아무 죄가 없으며 이 모든 일이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층의 시기에 의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대면해 본 후에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언하기를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은 무리가 소리 질러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고 했습니다. 바라바는 강도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던 계획이 좌절되자 군병들에게 명하여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라고 명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상의를 벗기고 기둥에 묶고는 무자비한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또한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며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빌라도가 밖에 나가 말하기를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겠다.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말하기를 보라 이 사람이로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으니 이제 석방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그들의 사주를 받은 무리가 수긍할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자 소리 지르기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말하기를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고 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말하기를 너는 어디로서냐고 물었으나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가 말하기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못하느냐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놓아주려 힘썼지만 유대인들이 외치기를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자 그만 굴복했습니다. 산헤드린이 서한을 로마 황제에게 보내 총독 빌라도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자를 놓아주었다고 고소하면 그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었습니다.

빌라도의 지시에 의해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두 강도 사이에 못 박았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패를 붙였습니다. 이것은 빌라도가 유대인들을 모독하기 위한 의도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두 강도들과 함께 못 박은 것은 강도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만인의 죗값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을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인이 되신 정도가 아니라 죄 그 자체로 취급받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편,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는 처형장면을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 왔습니다. 관원들 곧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의원들이 서서 예수님을 쳐다보며 비웃기를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라고 하였으며, 로마 군병들도 희롱하며 신 포도주를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비방과 욕설이 난잡하게 오가는 소란스러운 처형장의 분위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그런 자들을 향하여 침이라도 뱉어주고 욕을 퍼부어도 속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아버지여, 저 사악한 자들을 멸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해도 지나치지 않은 터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다니,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죄와 무지에 사로잡힌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구세주의 심정을 대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구세주께서 이처럼 행하실 것에 대하여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53:12)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인간들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가운데 가장 크고 심각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선민을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조상 적부터 고대해 왔던 구세주가 오셨는데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셨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말입니다. 그야말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항의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으며,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한 것이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과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무능해서 저항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런 주장은 그들의 무지를 드러낸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창조의 근본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천군들을 동원하여 대적들을 멸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는 말씀 한마디로 원수들을 모두 멸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대적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잡자 시몬 베드로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26:)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순순히 대적들에게 붙잡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은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한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로서의 책무를 한시도 잊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죄인들에게서 온갖 수모와 모욕을 당하시고 잔혹한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빼앗기기까지 모든 고난을 묵묵히 감내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같은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는 동안 있었던 또 하나의 극적인 사건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그것은 한 강도가 회심하고 구원받은 이야기입니다. 두 강도 가운데 하나는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대열에 가담하여 예수님을 비방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했습니다. 이 강도가 예수님을 보고서 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그가 그렇게 믿은 것이 아니라 처형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되뇐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 강도는 자기 죗값으로 형벌을 당하면서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마음을 더 완강하게 하여 뻔뻔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이제 몇 시간 후나 혹은 하루나 이틀 후면 고통 중에 죽을 터인데도 회개하거나 하나님의 선처를 구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세주와 나란히 십자가에 달리는 복된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강도처럼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회개할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강도는 그 동무가 예수님을 비방하는 것을 보고서 분연히(憤然히) 그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이 사람 역시 강도였으며 자기가 저지른 죗값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중이었습니다. 죄의 경중을 말하자면, 우리로서는 두 강도가 같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법에 의해 두 사람이 똑같이 사형집행을 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면을 살펴보면 두 사람은 아주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죄를 뉘우쳤으나 다른 한 사람은 뉘우치기를 거부했습니다.

혹자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뉘우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뉘우쳐야 소망이 있습니다. 시편 4920절에 이르기를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존귀에 처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명예를 얻고 부자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무의미하게 죽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하신 대로, 이승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내세가 있으며,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엄연한 사실 때문에 사람은 죽는 순간이라도 뉘우치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강도를 꾸짖기를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하니 두려워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인 가운데도 하나님을 두려워할 대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제 욕망대로 살아갑니다. 그런 신자는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동무를 책망한 강도는 자기의 죗값을 치르면서도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고통 중에서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눈을 돌려 옆에서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이 나사렛 예수를 보러 왔다는 것을 알게 된 이 강도는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주시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는 것을 듣고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위해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다니, 이 분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아닌가, 마음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나 태도가 인간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으리만치 고상하고 거룩함을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무언의 전도를 하신 것과 같습니다. 전도는 말로서만 하는 것이 아니며 삶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당하시는 중에도 그리스도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강도는 형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는 데도 혼자서 예수님의 편에 섰습니다. 이는 이 강도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드디어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강도는 자기를 낙원에 데려가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는 예수님을 향해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를 기억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겸비한 태도입니까? 이 강도가 한없이 겸손히 선처를 부탁했을 때, 주님께서는 즉각적으로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강도의 회개를 용납하셨으며 그가 가진 믿음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대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제아무리 윤리 도덕을 지켜온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똑같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죄인을 기소하는 검사도, 판결을 내리는 판사도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다 멸망 받을 죄인입니다. 종교가나 철학자나 예술가 할 것 없이, 남녀노소,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멸망 받을 죄인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3:20).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받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 사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루신 대속에 우리가 믿음으로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해 주면 무시를 당한 것처럼 불쾌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그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의 비참한 실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성경은 선언하기를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고 했습니다.

방이 어두우면 얼마나 더러운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밝은 햇빛이 비치면 작은 티끌도 환히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그 마음에 비취면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고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7:24)고 탄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불신 이웃에게 전도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이르기를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지 듣지 못하면 절대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전도의 사명을 먼저 믿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명을 행하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불신 영혼이 주님을 영접한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강도가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은혜로운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기에 너무 늦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시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농부는 절기를 잘 맞추어서 농사를 지어야지 때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망칩니다. 공부는 어려서부터 시작해야지 나이가 들어서 시작하면 배운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어려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해라도 빨리 믿어야 은혜 가운데 살고 세월을 허송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기회를 많이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일찍 주님을 믿지 못할 사정이 있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처한 여건이 주님을 믿는데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또는 일평생 바쁘게 살다 보니 신앙생활을 할 겨를이 없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믿지만 또 어떤 사람은 늦은 시기에 믿기도 합니다.

포도원 비유를 보면,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장터에 나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약속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주인은 아침 9시에도 나가서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당신들에게 상당하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12시와 오후 3시에도 장터에 나가 하릴없이 섰는 사람들을 불러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오후 5시에도 나가보니 그때까지 일을 얻지 못하고 섰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그들도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이들은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 일할 수 있을 뿐이지만 주인은 그들도 고용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기를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했습니다. 오후 5시에 들어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는 것을 보았을 때 먼저 온 자들은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자 포도원 주인을 원망하기를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 중 한 사람에게 대답하기를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는 구원에 대한 것으로 주님을 믿은 세월이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동일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저의 경험에 의하면, 정오에 주님을 영접한 노인 환자가 저녁 무렵에 별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임종을 얼마 앞둔 때에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구원은 믿기만 하면 받는 것이지 어느 기간 이상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강도가 이 같은 복음의 도리를 웅변적으로 말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부모, 형제, 친지들이 있거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믿고 믿지 않고는 그들의 몫이고 우리에게는 전해줄 책임이 있습니다. 핍박도 있을 것입니다. 완고한 사람들은 부모 자식, 형제의 의리도 끊겠다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전하십시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병상에 누워서, 임종을 기다리면서 여러분이 전해 준 말씀을 기억하고 이 강도와 같이 예수님을 부르고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의탁하게 될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강도가 처형당하는 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비유컨대 불 가운데서 건짐 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과 받지 못한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더 큰 것입니다. 전자는 영생이요 후자는 영벌입니다. 그렇다고 젊어서는 내 마음대로 살고 늙어서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야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다 이 강도와 같이 혜택을 받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때에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때가 언제일까요? 고린도후서 62절에 이르기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시점입니다. 이 강도에게는 십자가에 달렸던 그 때가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구원의 기회였으며,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편 강도는 그 마지막 기회를 거부하고 멸망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이 땅에서 평안한 생활을 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두 강도를 통해서 우리는 회개와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사람들만 한치한치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모든 사람도 한 치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 영혼을 불러가시더라도 기쁨으로 응할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는 천국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삶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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