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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사 님 설 교 말 씀 :::


  mogyang(2020-02-20 16:26:30, Hit : 118, Vote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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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백성을 위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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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기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같으니라”(욥 5:7)고 했습니다.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고난을 좋아하고 반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는, 어떤 인생이라도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인생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위로가 절실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이 제대로 위로 받고 있습니까? 누구에게 위로를 요구하면 될까요? 혹 누가 우리를 위로해 줄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극도의 슬픔과 절망 가운데서 사람들의 위로는 아무 효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위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고난 중에 있는 유다 백성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것은 아하스와 므낫세와 같은 왕들이 저지른 우상숭배의 죄악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양떼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여 길 잃고 방황하다가 결국 강도떼에게 끌려가게 된 것처럼, 유다의 왕들이 앞장서서 우상을 섬겼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우상숭배의 죄 가운데 끌어들여 하나님을 떠나도록 만든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고 왕과 백성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렇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진노 중에서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되, 유다 백성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다시금 포로에서 해방시켜 고토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할 기회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에게 선포하기를 “1)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사 40:)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비록 범죄하여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유다 백성을 징계하셨으나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할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범죄할 때 매를 때리시나, 그것은 분을 풀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우매함을 깨우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가하시는 사랑의 매라는 사실입니다. 잠언 3장에 “11)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뜻을 가지고 성도들을 징계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이 징벌을 통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옴으로 징계의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납하시어 위로하시고 회복의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거듭해서 말씀하신 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그만큼 크심을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 것은, 하나님의 위로는 죄 사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범죄에는 하나님의 징벌이 따르지만, 그로인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사하시고 위로를 베풀어 주십니다. 사실, 죄 사함 자체가 가장 큰 위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죄 사함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불화를 청산하고 화해를 이루어 평강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진정한 위로는 메시아를 통해서 받게 될 것을 선포하고, 유다 백성에게 장차 임하실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라고 강력하게 권했습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4)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리려면 먼저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외치는 자의 소리’ 곧 예언자의 외침을 귀담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했는데, 이는 광야 같고 사막 같은 바벨론 포로생활 가운데서 해방될 그 때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우리 역시 이 시대의 어둠과 시련을 맞이하여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있지만,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희망찬 내일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목이 엄동설한의 겨울 동안 마냥 죽은 것처럼 보여도 실은 다가올 새봄을 준비하듯이 말입니다.

한편, “외치는 자의 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이 누구냐?”고 질문하였을 때, 세례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엘리야냐?”하자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묻기를 “당신이 그 선지자냐?”고 하였으나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당신은 당신에 대해 무엇이라 하느냐?” 세례 요한이 대답하기를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묻기를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하니,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을 뿐 아니라, 친히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증거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지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자 예루살렘과 유대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메시아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말씀은, 고대에 왕이 행차하기 전에 길을 청소하고 울퉁불퉁한 노면을 평탄하게 정비했던 것처럼, 메시아께서 오시기에 앞서, 미리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는 것’이며, 세례 요한이 와서 이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의 준비란 어떤 것일까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라고 한 것처럼, 골짜기 같이 어둡고 음흉한 생각, 산처럼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를 통해 겸손하게 되지 않으면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습니다. 교만한 마음, 추한 마음을 회개하고 겸손하고 정결하게 될 때 그 사람은 5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고 하신 대로, 메시아의 영광을 보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메시아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갖춘 사람들은 기꺼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했습니다. 종교적인 특권을 누렸던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메시아를 영접할 마음의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했으므로 예수님에게서 독생자의 영광이나 은혜와 진리의 충만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의 특권을 방해하는 자로 여기고 로마 총독 빌라도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는 21세기에도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낮추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구원을 받지만, 교만하여 주님을 거부하면 자기 죄 가운데서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의 교만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불가능이 없는 것처럼 자신만만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가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풀과 같고 인간들이 누리는 모든 영화는 풀에 핀 꽃과 같이 유한합니다. 청년들은 마치 싱싱한 화초와 같이 아름답지만 노인들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 속에 선명합니다. 이처럼 칠팔십 년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지만 지나고 보면 너무 짧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4)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5)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 9)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12)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

모세의 시(詩)는 우리에게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라는 교훈을 줍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생존하시는 이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처럼 확실한 보장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치가들의 말은 물론이고 경제인들이나 학자들의 말도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말은 상황에 따라서 바뀝니다. 우리의 형편도 쉼 없이 변합니다. 그러므로 변하는 것들을 의지하면 허망한 결과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요동치 않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노쇠해 질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정세가 시시각각으로 변할지라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하므로 언제나 마음 든든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 분께 소망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대 백성에게 주신 회복의 메시지 곧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이 말씀은 구약시대의 유다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쉴 틈을 얻지 못하고 수고합니다. 스트레스와 피로가 누적되어 심신이 병들어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힐링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노인이나 장년에게만 힐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청년, 청소년, 심지어 아동들조차 힐링이 절대로 필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때에 힐링을 받고 심신을 회복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위로는 성도들 뿐 아니라 불신 이웃들에게도 필요합니다. 밥을 굶기 때문이 아니고 입을 옷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벨론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 무기력했던 유다인들처럼, 현대인들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악의 세력 앞에서 좌절하고 낙담합니다. 무슨 방법으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답은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하였듯이 하나님의 은혜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받은 하나님의 위로를 이같이 간증합니다.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

사도 바울은 그가 당한 고난에 대하여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을까요? 복음을 전하는 그에게는 언제나 위험과 핍박이 뒤따랐고, 항상 긴장과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 모든 것을 너끈히 감당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위로가 넘쳐서 모든 고난을 다 이겨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내 코가 석 자인데 남을 돌볼 겨를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제앞채기도 못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도와줄 엄두를 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도가 이런 이치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역량이 탁월해서 환난 중에서도 또 다른 환난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노라 하지 않고, 하나님께 받는 위로를 가지고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를 풍성히 받아야,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힘입어 구출 받은 경험이 풍부했으므로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너끈히 위로해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났을 때 세상의 수단방법을 찾지 말고 사도 바울처럼 자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할 줄 압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과 고통을 능가하고도 남을 하늘의 위로를 우리 속에 부어주십니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위로가 넘칠 때,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가족과 함께 위로를 나누어야 합니다. 힘들어 하는 남편, 아내, 자녀, 부모를 위로해야 합니다. 가족이 서로서로 이해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입니다. 이 시대의 첫째가는 특징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고, 셋째는 쾌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말세 사람들의 특징이요 이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자기 일에 바빠 다른 사람들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고독해지고 불행해 지고 맙니다. 행복은 가족이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형제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가족입니다. 당연히 누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온 성도가 함께 기뻐하고, 누가 어려움을 만나면 함께 걱정하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예배에 빠진 성도님이 있거든 바빠서 그런가보다 할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어려운 일을 만난 것은 아닌가,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울하고, 인사도 받지 않고, 성도들의 교제에 참여하지 않는 성도를 보면, 위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이 같은 일을 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생들을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복음을 ‘아름다운 소식’에, 그리스도를 양 무리를 보호하는 선한 목자에 비유하여 이 같이 선포했습니다. “9)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 11)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아름다운 소식”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에 있는 유다 백성이 해방되어 고토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포로 생활하던 유다인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높은 산에 올라 힘써 소리를 높여서 외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볼 때, 이 “아름다운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 61장을 보면, 메시아의 사역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1)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예언은 메시아께서는 이 세상에서 부자, 권력자, 강한 자들을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 슬픈 자들에게 긍휼을 주시기 위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10절에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오실 메시아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한 목자로서 그의 양 무리인 성도들을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셨으며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성도들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지만, 아직은 순례의 길을 가는 중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강림과 더불어 순례의 여정을 마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주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힘입어 마귀와 세상을 이기고 믿음을 굳게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앞으로 인공지능시대가 본격화되면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신세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이상적인 상태처럼 선전합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란 고성능 컴퓨터에다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해서 학습, 추리, 적응, 논증을 할 수 있도록 만든 프로그램을 작동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요즘은 컴퓨터의 성능과 프로그램 언어의 기능이 탁월해져서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인공지능이 바둑의 고수와 대국해서 이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그것은 인간들의 발명품에 불과합니다. 어찌 감히 하나님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 사람들은 영웅이나 인공지능이나 과학기술이나 돈의 힘을 의지하며 그 같은 것들이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믿지만, 그 결국은 우상처럼 허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누려야 합니다. 요즘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 역시 이 역병의 파급과 그로 인한 경제 침체로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위로를 필요로 하지만 위로 받을 곳이 없습니다. 그나마 요즘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을 통하여 위로 받는 한국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빈곤으로 고통하는 가족을 통하여 관객들에게 동병상련의 위로를 선사해 줍니다. 그러나 그런 공감이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힘을 발휘하지는 못합니다.

성도들이 누리는 위로는 성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누리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애통 중에서도 주님의 위로를 받아 고난을 이겨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고난당하는 이웃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날마다 하나님의 위로를 풍성히 받아 어떤 고통도 너끈히 감내할 뿐 아니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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